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조선-부여 관계 (문단 편집) == 문화적 관계 == >《위략》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매년 10월 음식을 나누어 먹고 노래하고 춤췄다. 이름하여 무천이라고 했다. 군사의 출정에 앞서 하늘에 제사하고 소를 잡아 발굽의 형상으로 길흉을 점쳤는데 갈라지면 흉하고 붙으면 길하다. >---- >《[[토원책부]]》 >(부여에서는) 전쟁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그 길흉을 판단하는 방식으로 소를 죽여서 굽의 모양을 보아 합하는 것을 길하다고 여겼고, 벌어지는 것은 흉한 것으로 여겼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東夷傳) 부여조 >《위략》에 이르기를 … (고구려에서는) 군사가 있으면 역시 하늘에 제사하고 소를 잡아 굽을 보아서 길흉을 점쳤다. >---- >《한원》 고려조 《[[토원책부]]》 내용에선 당초 알려져 있었던 무천이 [[동예]]에서만 행해지던 풍습이라는 상식과는 다르게 고조선에서도 행해졌으며 《삼국지》의 기록과 《토원책부》, 《한원》 등의 두 사서에서 공통적으로 인용한 《[[위략]]》에 따르면 부여, 고조선, 고구려 모두 소뼈를 이용한 [[우제점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를 볼 때 당시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에선 공통적인 풍습이 자리잡고 있었음이 시사된다. 고고학적으로 이르게는 기원전 6세기 중반 요동 지역에도 정가와자유형의 출현을 계기로 군장사회라는 복합사회가 출현하게 되었다. 이 정가와자유형이 그 일대에 미친 사회문화적 영향력은 상당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정가와자유형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 간 네트워크는 같은 시기 주변 지역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쳐, 그 결과 기원전 5~4세기부터 주변의 여러 지역이 연쇄적으로 군장사회 단계에 진입하였다. 또 정가와자유형의 존속 기간인 기원전 5~4세기 무렵에 [[지린시|길림시]] 등지의 서단산문화 후석산기의 집단 또한 군장사회로 발전하기 때문에[* 오강원, 2012, 동북아시아 속의 한국 청동기문화권과 복합사회의 출현] 부여의 기층문화인 서단산문화 역시 요동의 물질문화와 강한 친연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부여의 재지층이 고조선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파일:유수노하심 부여 가면.jpg|width=400]] 특히 부여의 상징적 유물인 금동가면은 [[랴오닝성|요녕성]] 탑만촌 출토 청동부 거푸집에 새겨진 인면상과 형태적으로 매우 유사한데, 이 거푸집 제작 연대가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 정가와자 단계이기에 당시 요동 지역의 고조선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거푸집에 새겨진 인물은 당시 요동에 거주하던 고조선인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인물상이 거푸집 제작 당시부터 의도적으로 표현된 점에서 청동 주조를 담당한 장인들이 자신들의 주조를 신성시하고, 주술적인 의미로 고조선인이 숭배했던 대상을 새겨 넣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부여의 금동 가면은 고조선 문화를 계승하고 있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종수, 2021, 『부여의 얼굴』, 동북아역사재단] 다만, 부여 초기 물질문화에는 고조선뿐만 아니라 북방초원문화의 영향 역시 매우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부여가 출자한 지역이 눈강 하류 일대이며 이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서요하 유역 주민 집단과의 활발한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기원전 3세기를 전후해 서요하에 거주하던 [[동호]]가 [[흉노]]에 의해 와해되면서 유민 집단이 대거 대흥안령 동록을 따라 눈강 중하류 일대로 유입되면서 눈강 유역에 북방초원 문화 요소가 스며들었다. 이에 대한 한가지 예로, 한국 청동기문화권에서는 생소한 치병동도(齒柄銅刀)의 아이디어를 흡수하여 서단산문화만의 독특한 청동손칼 형식으로 발전시킨 사례를 들 수 있다. 또 동북아시아의 촉각식검이 기원전 5세기에 처음으로 길림에서 등장하는데 검의 형식, 제작 연대, 지리적 분포 등을 고려해 볼 때, 이는 유럽의 [[할슈타트]] 촉각식검과도 연결되는 [[오르도스]] 촉각식검과 관련이 있어 고조선과 부여가 오르도스 초원지대의 주민들과 교류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길림 일대에서 먼저 만들어진 촉각식검은 차례로 요동, 평양, 연해주 지역에서 제작됐고, 이후 일본의 쓰시마와 [[규슈]] 지역에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촉각식검을 통해 [[위만조선]]과 [[부여]]가 교류한 사실이 입증되었음은 물론이고 해당 교역망이 한반도 남부를 거쳐서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Park Sun Mi, 2020, 「Antenna-Style Daggers in Northeast Asia from the Perspective of Interregional Interaction」]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